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제독 - 1

2024. 8. 14. 16:21해군사

충무공 이순신 표준 영정

 

三尺誓天 山河動色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
一揮掃蕩 血染山河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제독을 모르는 사람을 찾는것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그 만큼 한국에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한국인에게 있어 가장 상징적인 명장이자 제독 중 한명이다.


 해군과 육군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호칭으로 약간의 다툼이 있다. 해군에서는 이순신 제독, 육군에서는 이순신 장군이라 부르며 그닥 의미 있는 논쟁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해군에 있어서는 상당히 민감한 주제로 만일 해군 출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순신 제독(Admiral)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라 하면 맞아죽겠지만 현대 한국군에서 장군이라는 칭호는 육,공군 뿐만 아니라 해군에서도 장성들을 지칭하는 단어이기에 사실 이순신 장군이라 말하는것도 틀린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는 제독이라 부르는것이 더 적절하다 판단하여 이순신 제독으로 글을 작성하겠다.

 이순신 제독은 익히 알려진대로 현재의 서울시 중구에서 태어났으며 충남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소년시절 상당한 악동이었던것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이순신은 28살 무과 별시(조선시대, 경축할 일이 있거나 문신 중시가 실시될 때 시행되는 문과와 무과의 한 종류.)에 응시하여 승마 중 말이 넘어져 낙방하였고 낙마한 직후 시험장 안에서 자란 버드나무를 꺽은것으로 다리를 매고 시험을 치뤘으나 탈락한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4년이 지난 32세에서나 식년(조선시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서 권지훈련원봉사는 현재의 후보생 정도의 위치라 볼 수 있다.

 

그해 12월 함경도(현재 북한의 북동부지역) 동구비보(함경도 지역명)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하여 국경을 수비하는 역활을 맡아 본격적인 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3년여간 근무한 이순신은 훈련원의 종8품 봉사로 배속되어 근무하다 8개월 만에 충청도 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 되었다. 사유는 익히 알려진대로 서익의 지인의 특진을 반대해서이며 이 일로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관직생활을 이어가던 이순신은 36살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 종4품 만호로 부임하여 최초로 수군 근무를 시작했으며 남겨진 기록으로는 판옥선, 사후선 각 2척의 작은 수군 기지로 알려졌다. 참고로 현대 대한민국 해군의 계급과 대조해봤을때는 중령 정도 되는 위치이다.

 이후 1583년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 이순신의 상관이던 이용이 함경남병사로 급히 파견되는데 이용은 이순신을 지목하여 자신의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함경도의 관관이 되었다. 여기서 이순신은 여진족의 수괴 중 하나를 생포하는 공을 세웠으나 당시 상관이던 김우서가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보고없이 행동했다고 억지를 부려 공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당해 11월에 훈련원의 종7품 참군이 되었는데 그 직후 이순신의 아버지가 죽어 귀경해 있던 상황이라 이듬해 1월이 되어서 이순신에게 전달 되었고 당시 장례 품습에 따라 3년상을 지내고 복직하여 사복시의 종6품 주부로 복직 하였다.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고 근무 당시 처음에는 녹둔도 둔전관으로 김경눌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리석고 겁많은 자여서 이순신과 불화가 있었는데, 더이상 못 참겠는지 조선에 귀화한 성저야인(세종이 육진을 개척한 다음 오진의 성(城) 아래에 거주시키고 조선의 울타리로 삼은 야인.)을 적성 여진족으로 가장시켜 김경눌에게 겁을 주었고 도망치게 하는 바람에 이순신이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이후 이 일이 문제가 되어 함경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 전투 이후 군관 이운룡,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자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게 된다.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 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 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한 전투를 패전이라고 하진 않는다. 아군 피해도 방어가 취약하니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함경북병사 이일이 거부해서 생긴 일이었으며 조정에도 대략적인 전말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녹둔도 전투는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이순신은 승자총통 화기부대장인 우화열장(右火烈將)을 맡아 백의종군 석 달만에 이일이 이끄는 400여 명의 여진족 토벌군에 합류해 선조 21년인 1588년 1월에 일명 '시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전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낸 후 아산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녹둔도 전투가 이뤄진 후인 1589년 1월, 비변사는 조정신료들에 불차채용(不次採用) 할 무신 명단을 천거해달라고 요청하는데 이때 이순신은 영의정 이산해와 전 병조판서 정언신으로부터 추천을 받는다. 이산해는 직전에 우의정을 지냈는데, 우의정은 병조인사의 최종 결정권자였다는 점에서 당대 군부 내에서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

 1589년 2월, 같은 덕수 이씨인 이광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이순신의 좋은 평가를 보고 전라도 조방장으로 임명해 데리고 갔으며, 조방장 직을 잘 수행하여 당시 순천 부사이던 권준과 친교를 맺었다. 11월에는 선전관 임명을 받았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이순신은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선조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한 번에 종6품에서 종3품(10급 승진)까지 진급할 수 없다고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0년부터 1591년까지 이순신의 인사 발령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고을 현감, 육해군 절제사의 직책의 발령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인사 발령 및 승진은 당시 조선의 급박한 전쟁 준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능하고 실전 경험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특례였다. 또한 이는 이미 이순신이 이때부터 조정에 유망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관들이 이순신이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불차채용이라는 방식으로 비변사가 처음 선조에게 올린 불차채용 대상자 명단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선조가 따로 몇몇 장수를 거론하여 추가시켰는데,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전의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이번에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 임명했다. 이때 간관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간하자 선조는 다른 사람의 승진은 좀 늦출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끝까지 고집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조선을 구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드디어 1591년 47세로 정3품인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2년 만에 종6품에서 정3품이 된 것인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이름난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였다. 조광조는 2년 4개월 만에 종6품인 사간원 정언에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이 된다. 여기에서 류성룡과 선조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둘 수 없는 무리수였다. 전라 좌수영은 5관 5포, 즉 5개 고을과 5개 전문 수군 기지 소속 병력을 지휘하에 두고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들의 전력 강화에 주력했다.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도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해서 실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행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휘하 군관들의 순번을 정해서 차례대로 가왜장(假倭將)으로 임명했고 이 가왜장이 이끄는 함선이 가왜장선이 되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항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마저도 엄격하게 진행했으며 제대로 된 격식을 갖춰서 가왜장으로 임명된 군관에게는 직접 가왜장 임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이순신의 철두철미한 상무정신과 전투 준비는 이후 벌어진 7년간의 전란의 판도를 뒤집는 중요한 근간이 될 수 있었다.